모처럼 장모님이 대구에서 올라오셔서 큰맘먹고 비싼 레스토랑에 외식을 하러 들렀던 적이 있다. 맛나게 먹고 있는데 마침 옆테이블에도 나처럼 가족들이 와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보다는 대식구라서 시끌벅적한 것이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더 많이 시켜서 푸짐해보이는 것이 모양새가 좋았다.

그러다 우연히 거의 동시에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게 되었는데, 옆 테이블의 가장으로 보이는 분이 조금 앞서 결제를 하게 되었다. 카운터에 서서 지갑을 열고 카드를 꺼내는게 보였다. 카드를 긋고 사인을 하는데, 왠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사인이 사인이 아니었다. 또박또박 글씨를 적어내려가는데, 가만히 보니 회사이름이 아닌가. 그렇다 이 카드가 개인카드가 아니라 법인카드였던 것이다.

그렇게 화목해보이던 가정의 후덕한 마음씨의 아저씨가 회사돈이나 유용하는 부도덕한 인간이었다니...


목격하다

솔직히 고급 룸싸롱에 가서 수백, 수천씩 흩뿌리며, 그야말로 돈지랄을 하는 파렴치한에 비하면, 가족과의 외식정도는 아주 애교수준정도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작은 잘못이라고 해서 잘못하지 않은게 아니지 않나.

규모가 작은 회사일 수록 직원들에 대한 복지는 부족하기 마련이고, 법인카드 따위가 말단 직원들에게까지 지급될리 없으니, 만약 그 아저씨가 작은 회사 중역이었다면, 자기 직원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모두의 몫인 공금으로 자기 가족 배불린 것 밖에 안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 정도 음식을 먹을 돈이면 작은 웹관련 업체 전직원들이 한번 회식도 가능한 금액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기득권을 기대하는 관대한 사람들

다음날 회사에 가서 점심시간에 문득 생각이 나서 전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분 너무하지 않나 라는 말을 꺼냈다. 당연히 내말에 동조할 거라 예상했었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이란게 참으로 제각각인줄은 알았지만 ㅋㅋㅋ 이렇게까지 다를줄은 몰랐다.

"그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고초를 겪었음을 고려한다면 그정도는 충분히 용인해줄만 하다"

라는 것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은 그렇게 자유롭게 회사공금을 쓸 수 있는 위치의 사람도 아니었고 앞으로 그렇게 되리란 보장도 없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좀 비약일 수 있으나,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그런 위치에 오른다면 필시 똑같은 행동을 할 사람이다. 아니 더한 짓도 할지 모른다.

도덕불감증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지나칠지 모르겠다만, 원래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법. 자기가 그런 자리에 오리기까지 노력한 것이 회사카드를 개인용도로 유용하려고 한 것이 아니지않나. 그리고 회사에서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보상을 법인카드로 준 것도 아닐테니 말이다.

정말 웃기는 것은 자신이 기득권층도 아니면서 기득권층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도 언젠가는 기득권을 얻게 될 것이고, 그때 나도 재미좀 보겠다는 거지. 그런데, 과연 그 기득권의 기회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올까?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공산당, 사회주의도 아닐뿐더러, 군대처럼 시간만 지나면 계급장 달아주고, 때가 되면 떠나는 그런 공평한 곳은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때가되면 돌아오는 기득권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치열한 경쟁과 각고의 노력으로(그것이 아부나 줄서기라 할지라도) 겨우 한계단 한계단 오를 수 있는 사회란 말이다. 기다린다고 옹호한다고 그 기득권이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기득권이 나에게 오지 않기때문에 기득권층의 부조리를 용납할 수 없다는게 아니다. 기득권층이 갖는 기득권에 따르는 의무인 만큼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란 말이다. 의무를 따르지 않는다면, 기득권도 없어야 당연한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도 기득권을 가지면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안되는 기대감에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문제라는 말이다.


로맨스를 즐기는 사람들

정말 아이러니는 "그자리에 가기까지 고초를 겪었음을 고려한다면 그정도는 충분히 용인해줄만 하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최근 문제되는 공공기관 감사들의 외유 같은 문제에는 날을 새워가며 독설을 퍼붓는다는 거지. 자기는 공공기관 감사가 될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요컨대, "남이하면 불륜, 내가하면 로맨스"라는 건데, 그런 식의 그릇된 행동에 결국 피해를 입는 사람이 누구일까?

누구나 자기 위치에서 상대적인 기득권은 다 갖고 있다. 아버지는 자식에 비해, 형은 동생에 비해, 선배는 후배에 비해...

잠깐이라도 좋으니 지금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다시한번 천천히 되짚어보고 반성해보자. 혹시 내가 나만의 로맨스를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개똥철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1) 2007/05/31
정말로...  (0) 2007/05/30
기득권을 기대하는 관대한 사람들  (1) 2007/05/22
무언가를 안다는 것 그리고 많이 안다는 것  (0) 2007/05/21
동상이몽  (0) 2007/05/21
야근과 야근 수당  (6) 2007/05/18

Posted by 왕구라

트랙백 주소 :: http://gooranet.tistory.com/trackback/88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Chun 2007/05/23 1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분류가 개똥철학으로 되어있었네요;;

    저도 절 객관적으로 판단하는게 안됨..